“원장님의 삶은 희극이라고 노래해주고 싶다”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사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일요일 오후 사람들을 보며 카페 창가서 앉아 있곤 한다. 한 가족이 걸어간다. 엄마와 여자아이 아빠와 남자아이. 초록이 가득한 가로수 사이를 햇살 가득 받으며 어디론가 걸어간다.
그들은 한 곳을 보며 걸어간다. 천천히 느긋하게 장난을 칠법한데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진 않는다. 한 곳을 보고 한 가족이 걸어가는 모습은 행복의 완전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발걸음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하루 종일 노느라 지쳤을까. 아이들은 더 놀고 싶다고 하는데, 어른들의 들어가자는 성화에 못 이겨 집으로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화를 주고받을 법도 한데, 오로지 한곳을 보며 지루하게 걸어만 간다.

완전체 같은 구성원. 가장 보기 좋은 구성원 같은 느낌은 살아본 시간 때문일까. 아들 하나 딸 하나에 길들여진 광고성 전파 때문일 것이다. 남자의 지루한 발걸음, 여자의 권태로운 얼굴에서 아이들 때문에 억지로 산책 나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처럼 완전체 같은 모습 속에 숨겨진 이면은 반드시 있는 법이다.

가장 보기 좋은 희극 속에 숨어있는 비극의 정체는 살아온 삶 탓인지도 모른다. 그냥 온전한 한 가정이 한 곳을 향해 행복함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족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음에도 그리 생각해보는 것은 현상을 삐딱하게 바라보곤 하는 습관의 영향일 것이다. 나만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불완전하지 않음을 위로 받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동기나 선배들은 잘 사는 것 같다. 치과도 잘되어 비싼 외제차로 바꾸고, 골프도 자주 나가고, 콘도 회원권이나 아이들 학교문제로 강남으로 이사 간다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진다.
옆 치과도 잘되는 것 같고, 모두가 아무문제 없이 조직을 운영하는데 ‘왜 나는 오늘도 많은 문제들로 골치 아파 하는가’라는 자문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 카페에 앉아 치과 매뉴얼 정리를 하고 있는 마음이 삐딱하니 그리 한번 꼬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 직원의 이직이 치과전체를 흔들어 놓기고 하고, 환자들은 진료비가 비싸다고 아우성이다. 기공물은 잘 맞지 않아 체어타임을 잡아먹고, 일부환자의 ‘예약하고도 기다리면 예약하는 이유가 뭐냐’고 대기실서 내뱉는 볼멘소리가 들려  온다.
진땀 흘려가며 체어 옮겨 다니다 보면 하루가 저물고, 진료시간 제대로 못한 차팅으로 하루마감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밤은 성큼 다가와 있다. 그리고 다시 아침 출근, 나만 이렇게 사는 것 같다. 그렇다고 만족스런 경영도 아니다보니 가끔은 ‘이건 내가 사는 비극’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그러나 누군가 밖에서 보면 나는 성실하고 깔끔한 치과원장이다. 전문적인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삶을 일구어 나가며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모습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참 열심히 진료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참 꼼꼼하고 세심하게 사소한 것까지 잘 챙긴다는 얘기도 가끔 듣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희극이다.

나의 왕관은 마음 속에 있지, 머리 위에 있지 않다네
그 왕관은 다이아몬드나, 인도의 보석으로 장식된 것이 아니요
눈에 보이지도 않지, 나의 왕관은 ‘만족’이라 호칭 된다네
그것은 왕들이 좀처럼 갖지 못하는 왕관 일세

세익스피어가 노래한 ‘헨리 6세’의 한 구절이다.
당신의 삶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환자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는 ‘사명’이라고 이름 불러주고 싶다. 당신의 삶은 희극이라고 노래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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